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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우울할 때는구운 달걀

by 타박네 2014. 12. 17.

우울하다.

이 우울감은 유독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올들어 발생한 여러 대형 사건 사고로 온 국민이 집단 우울에 빠지기도 했으니까.

거기에 개인적으로는 악재까지 겹쳐 나에겐 정말 힘겨운 한 해였다.

그리고 겨울이다.

오직 원컨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봄인 세상에서 살고 싶은 내게

겨울은 쥐약이나 마찬가지다.

장갑 속에서도 시리다 못해 아린 손가락 때문에 또 우울하다.

 

며칠 전 인터넷 바다에 떠도는 정보 하나를 건져올렸다.

어느 한의사가 채식의 위험성에 대해 써 놓은 기사다.

구구한 설명을 다 옮길 수는 없고 결론적으로

오랜 채식은 수족냉증과 우울, 불안, 현기증,퇴행성디스크 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신뢰도를 떠나 내 입장에서 봤을 때

허어,이런 족집게 무당을 봤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우연치고는 절묘하다.

퇴행성 디스크라면 관절염과 더불어 20대 초반부터 앓아온 내 고질병이고

현기증과 수족냉증은 옵션처럼 따라붙은 껌딱지같은 병이다.

40대 초 이미 노인의 것과 다를 바 없는 척추뼈 사진 앞에서

의사로부터 고집스런 편식에 대한 경고를 들은 바 있다.

 

늘 부르짖지만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동물 생존권이나 복지에 대한 거룩한 신념이나

남다른 종교적 이유로 채식을 고집해온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고 오늘까지 이리 살고 있을 뿐.

어쩌다로 시작한 채식이 채 열 살도 되기 전이니 참 오래 되기는 했다.

채식이란 말이 낯선 시절에 내가 생선을 포함한 육식을 일체를 안 한다 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별스런 꼴을 다 본다거나 안쓰럽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다이어트와 웰빙 바람을 타고 채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더니

최근 가수 이효리가 채식주의를 선언하며 다시 한 번 화제의 중심에 서고  

급기야 그에 따른 부작용까지 언급되고 있다.

이제는 어디서고 풀 먹는 사람들을 배려한 식당과 메뉴를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계인 보듯 하던 시선에서도 많이 자유로워졌다.

나와 한집에 사는 사람도 이제는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됐다. 

그건 좀 서글프다.

 

공부한 그네들이 분류해놓은 다양한 채식주의에 굳이 끼워 맞추자면

나는 우유나 달걀 꿀 정도는 먹는 베지테리언에 가깝다.

동물에서 생산된 일체의 유제품조차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비건이라고 한다.

어떤 주의든 제 신념대로 한세상 살 권리가 있으니 그건 그렇다 치는데

내 경우는 아무래도 채식 부작용의 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정형외과 의사의 경고 이후

유제품 일부와 해산물 중 갑각류 정도를 조금씩 섭취하긴 했으나 

사십 년 넘게 채식에 길들여진 입맛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제일 먼저 아픈 소리를 낸 건 관절 마디마디였다.

하지만 그 따위는 본래 내 성향이 아닌

무한 긍정의 힘을 발휘해 끊임없이 운동을 한 결과

어지간한 산 정도는 가뿐 오르내릴 만큼 단련시켜 놨다. 

생각할수록 자랑스럽다.

그리고 어쩌지 못한 우울 얘긴데...

내 입으로 우울이라고 나발부는 자체가 일단 반은 치유가 됐다는 증거일 수 있겠다.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시대가 주는 우울과 

개인적인 깊은 상처에서 비어져 나오는 우울

그리고 오랜 채식의 부작용 우울.

일단 나는 앞의 두 것들을 통합해 채식의 부작용쪽에다 몰아넣을 생각이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그게 제일 만만한 콩떡이다.

걸핏하면 주변 지인들 붙들고 징징거리지만 사실 나는 멘탈 갑, 멘갑 언니다.

이미 세상 풍파 면역주사를 수없이 맞아온 터라

어지간한 충격 따위로 멘붕하지 않으며 개무시할 배짱도 가지고 있다.

것도 대견하다.

 

우울의 처방으로 일단 모자란 동물성 단백질을 적극 섭취해 보기로 했다.

채식 잡식을 떠나 영양의 불균형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므로.

헌데 참 고민 된다.

느닷없이 입에 맞지 않는 남의 살을 우적우적 씹을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우선 그간 게을리 하던 우유 달걀부터 조금씩 챙겨 먹어야겠다.

건강하게 살아남아야 불의에 맞써 싸우든

밝은 햇살 아래 상처를 드러내놓고 한땀한땀 봉합을 하든 할 게 아닌가.

 

방금 밥솥에서 꺼냈다며 뜨거운 구운 달걀 봉다리를 들고온 친구 재벌아, 고맙다!

오늘 아침 모 방송국 뉴스에 한탄강 다리에서 취재해간 강추위 소식이 나왔다지만

네 덕에 주절주절 떠들다보니 마음 한켠이 따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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