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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그저 그런 일상

by 타박네 2015. 11. 27.

 

무얼 해달라 보채는 식솔들이 없는 전업주부의 일상은 늘 그저 그렇다.

어제 먹었던 잔반 오늘 밥상에 슬쩍 다시 올리고

어제 닦았던 솥단지 냄비 또 닦아 건조대에 쌓아두고

물높이 3단에 맞춰 세탁기 한 번 돌리고 처삼촌 묘 벌초하듯 청소기도 한 번 돌리면

대충 하루에서 절반 정도의 시간은 죽일 수 있다.

동절기에 접어들면 나는 시간을 보낸다라던가 쓴다라고 하지 않고

죽인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기습적인 한파가 몰아닥친 지금부터

동막골 복수초가 봄이어요 하고 노란 신호탄을 쏠 때까지,

춥고 지루한 그 시간들을 내 무의식은 무찔러야할 적이라 여기는 거다.

 

가끔 뼈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치고박는 싸움질도 좀 하고

화해 차원에서 팔짱끼고 백화점 쇼핑도 좀 가고 그러면 차라리 좋겠어요.

그날이 그날인 일상을 푸념이라도 할라치면 동네 어르신,

복에 겨워 오강 깨는 소리하고 자빠졌다며 혀를 끌끌 차신다.

그러면 나는 행여 어르신 말씀이 땅바닥에 떨어져 고물이라도 묻을세라

냉큼 받아 쳐올린다.

것도 좋은데요?

새 오강 사러 장에도 가고요.

이러면서 시간 한 토막을 또 죽여 없앤다.

 

특별시로의 특별한 외출이 있는 날만 빼면

내 하루 동선은 어쩌면 한치의 오차의 없이 그리 똑같은지.

내가 개미 한 마리라 치고

저 공중에서 눈알이 애드벌룬만한 거인이 내려다보고 있다면

저거저거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짓거리 다시 시작됐군,

발바닥에 군살 배길까봐 용쓰네 할지도 모른다.

 

베란다 문을 열 적마다 진저리 치게 추운 아침.

평소와 다른 하루가 될 뻔했던 인사동 찻집에서의 약속 하나를 깨고 

전자렌지에 찜질팩을 데워 등에 깔고 티비 앞에 누웠다.

아이고야, 그 잘난 드라마 스토리도 당최 달라진 게 없다.

오늘도 어제 판에다 찍어내려다 보다.

 

맛있는 거 먹거나 좋은 일 있을 때는 생각 안 나다가

징징거려야할 일이 있을 때만 떠오르는 친구에게

큰 선심쓰듯 안부전화 한통 넣어봐도 신통치 않다.

이쯤되면 벌떡 일어나야 한다.

똬리 틀고 앉았다가 몸에 사리라도 생기면

사후 한 알씩 농갈라주는 것도 큰일이다. 

 

재벌친구 노래방에 가는 길에 

누가 흘린 동전이라도 하나 떨어져 있을까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연말이 가까우니 철길 육교에 토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술집과 식당이 즐비한 시내쪽에서 올라오는 계단 방향에 특히 많다.

끝내 이겨내지 못한 음주로 고달팠을 그들의 속사정보다

우선 더러워서 내가 살 수가 없다, 아주.ㅠ

육교에서 뛰다시피 내려와 좁은 찻길에 이르자 

소형 트럭 하나가 내 앞을 스윽 지나간다.

운전기사와 내 눈이 서로 마주친 순간.

생선차 아저씨다!

트럭에 생선을 싣고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방문판매를 하시는 생선장수 아저씨.

어머님 살아생전 내내 그분의 단골 고객이셨고

시집 가자마자 나도 단골이 되었으니

그 인연의 역사가 결코 적지 않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떠돌다 다시 여기로 들어오는 사이

생선차도 아저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동장군이 겁탈이라도 할까봐

투툼한 점퍼 안으로 거의 얼굴 절반을 밀어넣고 있었는데도

아저씨는 대번 나를 알아보시고 환하게 웃으신다.

생선을 살 때마다 우리 메누리가 고기를 안 먹으니... 하시던

어머님도 아직 기억하고 계실까?

길을 돌아 사라지는 트럭 뒤꽁무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따스해지면서 행복하다.

 

내일은 주말, 뭔가 특별한 요리라도 해 먹을 요량으로 넉넉히 장을 보고

토사물을 요리조리 비켜가며 다시 육교를 건너고

얼마 전 호랑이와 곶감이란 주제로 벽화를 그려넣은 철길 담벼락을 따라 쭉 걷다가

하루에 몇 번이라도 참 정스럽게 인사를 받아주시는 이장님댁 닭장 앞,

아파트 후문 계단에 이르자 어라! 아까와 다른 그림이 보인다.

시커먼 사람이 다가가는데도 미동조차 없는 개 한 마리.

계단 한쪽에 마치 조각상처럼 앉아 있다.

어쭈 조것 봐라,쿵! 발을 굴러보니

거참 귀찮게스리 하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다시 원위치 하는 데 걸린 시간 0.5초.

기다리는 게 뭐냐?

물어본들 알아먹지도 못할 거고

알아먹었단들 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장난스레 그 옆을 우당탕 지나

여전히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누렁이를 남겨두고 들어온 저녁.

오늘이 어제와 다른 게 있다면 뭐 이런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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