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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함박눈 내리는 아침

by 타박네 2015. 12. 21.

        목련 가지 위의 새들로 소란스러운 아침.

       제법 실한 눈송이들이 쏟아져 내렸는데요.

       외출을 망설이는 딸에게 날이 푹한 걸 보면  

       금새 녹을 눈이야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생각이 호들갑스러운 저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했습니다.

       아, 물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단골카페의 뜨거운 커피였죠.

       저는 어지간해서는 친구 없이 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커피 양념으로 수다가 꼭 들어가야하는 까다로운 식성을 가졌거든요.

       눈치빠른 친구는 압니다.

       제가 커피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걸요.

       이 아침 커피와 함께 생각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푸드덕 날개를 털어가며 호들갑 떠는 새들은

       눈이 무서워 저러는 걸까 좋다고 저러는 걸까

       유심히 지켜보던 목련나무 사이로

       무지개우산을 쓴 사람이 지나갑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복도식 옆 건물 15층에 올라가 

       눈 내리는 시내와 은대리 들판을 보는 건 어떨까.

       아니면 인적 없는,없을 것이 분명한 한탄강역으로 달려가 

       기차를 기다리는 여행객처럼 서성이는 건?

 

       바로 그때 휴대폰 전화벨이 울리죠.

       오래 묵어서 이제는 삭아가는 친굽니다.

       응, 뭐?

       여보세요 대신 짧고 불친절한 인사가 오갑니다.

       왜? 눈 온다고 전화했냐?

       눈 오냐? 여긴 비 오는데?

       그냐? 여긴 함박눈.

       어쩐지 우리 동네가 좀 고급진 것같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렇게 기상청 관계자들처럼 오늘의 지역날씨까지 주고 받았죠.

       최근 자칭 성황리에(개뿔!) 마친 합창단 공연 뒷 얘기며

       공사 중인 집 진행 정도를 포함한 상투적인 일상 보고에 이어

       기습적인 질문이 날아듭니다.

       너 요즘 초콜렛 끊었냐?

       그 말은 너 마약 끊었냐처럼 아주 자극적으로 들립니다.

       응, 커피도 하루 한 잔만.

       재활치료 잘 하고 있는 마약 중독자처럼 공손하게 대답했죠.

       잘했다.

       칭찬 한 마디에 살짝 우쭐해집니다.

       전화가 아니라 실제 그 친구 앞이었다면 우쭐 대신 냅둬,

       살만큼 살았어 하며 어깃장을 부렸겠지만요.

       다 소용없고 아무튼 결론은

       현미밥에 제철 채소 위주로 잘 먹는 게... 하다가

       넌 그러고 있는데 뼈다구는 왜 그모양이냐? 합니다.

       위로인지 조롱인지 헷갈려 말문이 턱 막힙니다.

       수다가 무르익어 최근 개봉작과 지난 영화 얘기로 넘어갔죠.

       거 뭐였더라...있잖아 그거...아,그거 그거...

       대화 중 이제는 거의 추임새화 된 이런 말들이 난무해도

       대충 다 알아듣고 대답하는 사이가 우립니다.

       어렵게 떠올린 작가의 이름을 강조하며 꼭 잘 적어둬 했지만

       그새 까먹고 똥 됐습니다.

       조금 있다 검색해서 잡아내면 되니까 그런 건 사실 별 문제도 아닙니다.

       무한 정보의 바다,인터넷이 있는 한 까짓 뇌세포 몇 억 개 더 죽어나간들

       그게 뭐 대수랍니까. 

       딸의 호평이 있었던 상영작 '내부자들'이나 보러 나갈까 한다 했더니

       그냥 뜨뜻한 방구석에서 티비로 아주 좋은 영화나 한편 다운받아 보랍니다.

       제게 강력 추천한다며 소개한  영화는 '와일드'.

       두서없이 떠드는 스포일러의 말을 종합해보건대 

       폭력적인 어버지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서 받은 깊은 상처로

       자학을 일삼던 여주인공이 무작정 길을 걸으며 내면의 상처를 치유 하고

       행복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인듯 싶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가슴 속 어느 한켠이 아릿합니다.

       참,이런 영화 추천 더 이상 필요 없다 전해라 한다는 걸 깜빡 잊었네요.

       111에 이사를 한다니 119 즈음에 한번 가보겠노라는 인사를 끝으로 

       전화 수다는 끝났는데요.

       그새 눈이 그치고 하늘은 말끔하게 개었습니다.

       한바탕 쓸고 닦고 해야겠어요.

       집안이든 내 마음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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