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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

by 타박네 2016. 5. 6.

 

 

아침을 먹자마자 텃밭에 가려고 꽃동무님이 주신

야생화 씨앗 봉지와 이름표가 될 일회용 숟가락을 챙겨

현관 앞에 두고 잤습니다.

소리 없는 비는 밤을 지새우고 아침까지 이어졌습니다.

장화에 흙귀신이 처덕처덕 들러붙겠지만

따로 물 뿌릴 수고 없이 씨앗을 묻기에는 오늘이 맞춤하죠.

이제 그만 그쳐만 준다면.

 

오전 내내 하늘 눈치를 살피며 보냈습니다.

창을 열고 팔을 내밀어 빗방울 굵기를 확인하기도 했어요.

안개비 정도라면 모자만 써도 충분하지 싶었거든요.

쉰내 풀풀나는 묵은김치를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 넣은

성의빠진 비빔국수를 만들어 점심 한 끼니를 때울 때까지도

비는 오는 건지 가는 건지 뿌리자는 건지 거두자는 건지

사람 약 오르기 딱 좋게 오락가락 했습니다.

먹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 실종 되었거나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죠.

그리고 해가 중천에 뜬 시간쯤이면 밭일을 하기에는 늦은감도 있구요.

하루 늦게 씨앗을 심고 하루 늦게 꽃을 피운 다는 것은 

그 다음 하루를 더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무엇보다 제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

아니 열두 밤도 넘는 내일이 수두룩하게 남았구요.

해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웠습니다.

이후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요량이었죠.

 

쌀벌레로 추정되는 날것 한 마리가

온 방을 휘젓고 다녔지만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낮잠도 자고 티비도 보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이 있다면 책도 좀 읽구요.

꽃과 꽃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제외한 그 모든 행위는

제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해당됩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리 되었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자유로운 시간에

아무 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것,병일까요?

꽃 보기 힘든 알래스카로 강제 이주 시키기 전에는

절대 나을 병이 아니라던 지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비가 그쳤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참았습니다.

책 서너 장 읽다가 까무룩 잠들었다가

드라마 재방송 보다가 휴대폰 검색 좀 하다보니

여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구름 속 어딘가 있었을 해가 저문 시간.

다시 베란다 창을 열고 오성 이항복이 그랬던 것처럼

소매를 걷어붙친 팔뚝을 쑥 내밀어 보았습니다.

엿이나 먹어라로 오해하지는 않았겠지요,하늘님? 

지난 시절에는 없었던 사무친 감사함으로

하늘을 우러르고 경외하며 살고 있는 거 아시죠?

오호,비가 그쳤습니다.

 

불현듯 하루종일 커피 한 잔 못 마셨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밀리면 안 될 숙제라도 되는 양 집을 나섰죠.

역쪽으로 난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손바닥만한 이장님 텃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쑥갓과 아욱과 쪽파가 며칠 새 한여름 푸성귀처럼 이들이들합니다.

늘 그렇듯 천둥번개 치는 날만 빼고 나와 계시는 이장님께 비결을 물었습니다.

대답 대신 마음껏 뜯어 먹으랍니다.

이제 이장님 눈에도 보이나 봅니다.

제 등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굶어 죽은 귀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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