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남편과 밭에 갔습니다.
토마토와 가지의 간격이 너무 밭다는 어르신의 조언을 받아들기로 했어요.
밭 한 고랑을 일궈 널찍하게 자리잡아 줬습니다.
요기만 하는 정도의 아침을 먹고 흙먼지를 씻어냈는데도 여덟시 조금 넘은 시간.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는 휴일입니다.
요즘 기상청는 더 이상 구라청이 아니죠.
온다면 옵니다, 쥐어짜서라도.
한 번 더 오늘의 날씨를 검색하고는 아쉬움을 접었습니다.
사실 어지간하면 혼자라도 고대산 등산을 감행하려 했거든요.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정상 부근에 피었을 흰각시붓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제까지도 지인들의 만류가 이어졌습니다.
여자 혼자 산에 가는 거 아니라는 말에는 속으로
이 나이에 성별을 가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며 무시했어요.
하지만 천둥 번개까지 친다더라에서 그만 흰각시붓꽃을 놓아버렸죠.
햇감자를 듬뿍 썰어 넣고 수제비를 끓여 직장인 점심 시간에 맞춰 먹었습니다.
아직도 바람결이 건조한 그 때,
실땅님 지인으로부터
산행 중 복주머니란 자생지를 발견했노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탐스런 두 송이 꽃과 함께
내년에 꼭 같이 옵시다라는 메세지가 연이어 날아들었죠.
그 내년은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을 아주 먼 미래처럼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잠시 뒤 여행 중인 실땅님으로부터
잘 있다는 안부 대신 탁발스님 사진 몇 장이 왔습니다.
거기서도 꽃사진만 찍을 줄 알았는데 뜻밖입니다.
그동안 일요일마다 어김없이 꽃탐사에 나섰어요.
그게 세 달쯤 됩니다.
벌써 습관이 된 걸까요?
습관이 지속되면 중독인 거죠?
꽃동무님들이 가신 먼 산에서 거둬들인 마음이
고대산에 잠시 머물다 다시 더 가까운 땡땡골로 들어갑니다.
박쥐나무와 함박꽃나무,찔레꽃이 한창 흐드러졌을 겁니다.
물 흐르는 가까이 붓꽃과 풀솜대와 당개지치도
바람결에 일렁일렁 춤 추고 있겠죠.
그럴겁니다.
창밖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것으로 보아
하늘이 기상청과의 약속을 지킬 모양입니다.
오랜만에 한가로운 일요일이 참 더디게 흐릅니다.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제 얼굴이
금연 삼 일째를 맞은 애연가의 모습과 닮아 보였던 걸까요?
비 오기 전에 얼른 땡땡골에라도 다녀올까 하니
남편은 공 차는 놀이도 뒷전으로 물리고 선뜻 그러자 합니다.
그런 대답이 고마워 됐으니 커피나 한 잔 마시러 나가자 했지요.
남들 보는 꽃 하루 안 본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꽃, 그까짓 꽃.
기찻길 옆 카페 '온실'에서 시원한 커피를 마셨습니다.
한 시간 넘게 머문 동안 기차는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어? 한 시간에 한 번씩 들어오고 나가는 거 아니었어?
언젠가부터 승객 감소의 이유로
기차 운행 횟수가 줄었다는 걸 그제서야 떠올렸습니다.
새 전철 역사가 들어서고 더 이상 기차를 볼 수 없게 된다면
꽃 진 산과 들을 볼 때처럼 많이 서운할 겁니다.
기찻길 옆에서 살아온 세월이 예전 기차 만큼이나 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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