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내 영양가 없는 뼛속에 먼저 들어오는지
온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흐믈거린다.
햇살 아래를 걷다보면 스르르 녹아 땅 속으로 스며들 것같아
어디 담벼락에라도 기대 한 숨 자고 싶은 지경이다.
하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꼭 해 보고 싶은 일 중에 하나가
바람 없는 봄 어느 날,
볕바른 흙 담벼락에 기대 꾸벅꾸벅 졸아보는 것.
생각만으로도 좋다!
요즘들어 과제가 뒤따르는 동화책 읽기만 계속 하다보니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긴 커녕
십대에도 많이 하지 않던 잔꾀만 늘어나는 것 같아
자, 그러면 우리 꽃같은 이십 대 피오나가
읽은 책이나 한 번 볼까나 하고 고른 것이 이 책이다.
제목이 탁 마음에 꽂힌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뼈가 녹고 살이 흐믈거리는 봄맞이 진통중인 이 상황에서
사랑 이야기는 좀 그렇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사랑 안 하는 죄로 당장 유죄 선고를 받고 교도소 철창에 갇혀 콩밥을 먹으며
하루 천 번 씩 삽질을 한다해도 뭐 딱히 내세울 대책이 없는 이 시점에서
내게 필요한 건 눈물나는 사랑이 아니라
양무릎에 붙일 파스 두 장과 초코렛 몇 알 정도니 말이다.
이시대 최고의 드라마 작가 노희경.
'거짓말' '내가 사는 이유' '꽃보다 아름다워' '그들이 사는 세상'......
두터운 마니아 층을 가지고 있다는 작가의 드라마를
불행히도 난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뉴스와 다큐멘터리만 보는 고상한 취미를 가져서가 아니라
t.v가 없던 지난 세월 탓이다.
이제는 좀 즐겨보자 해도 불륜, 불치병,출생의 비밀까지
막장드라마의 3요소를 고루 갖춘 드라마가 판을 치다 보니
t.v시청료와 시간이 아깝다.
아름다운,
고단한 삶에 위로를 주는 대사 쓰기로 유명하다는 작가 노희경의 에세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책 표지 그림이나 삽화로 미루어 보면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작가의 나이는 이미 불혹을 넘었단다.
그럼에도 참 여리고 맑은 글이다.
하긴 사랑을 말하면서
국경에 줄 쫙 긋고 나이로 철조망 치고 신분으로 벽 쌓는 건 우스운 얘기겠지만
'사랑' 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감성은 아직 심장에 굳은 살 안 배긴 열 여덟처럼 보인다.
"나는 한 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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