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64 시월 텃밭 서리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는데 어쩌자고 꽃은 자꾸만 핀다. 미스터 선샤인의 변요한처럼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에 마음을 쉽게 주는 나는 걱정 하나를 더 보탠다. 밤 사이 꽃잎이 얼지나 않을까 아직 여린 봉오리들도 많은데... 어깨 아끼느라 풀들을 실하게 키웠다. 속 시끄러운 날에는 밭으로 간다. 그곳에는 내 머리 속 잡념처럼 와글와글 잡초들이 지천이다. 날 선 새것도 있지만 손에 익은 녹슬고 무딘 낫을 집어 든다. 그리고 오롯이 풀과 낫에만 집중하는 시간들. 스님들의 삭발의식이 이와 같을까 생각했다. 아픈 어깨만 아니라면 내년에도 두어 고랑쯤 잡초를 키워 신들린 낫질을 계속하고 싶다만.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터지길 수 차례. 어쨌든 올해 풀 농사 한 번 잘~ 지었.. 2018. 10. 24. 8월 텃밭 앨범 안에 아직 지우지 못한 사진이 남아 있다. 사진 속 늙어버린 오이와 시들어 버썩 마른 옥수수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계절은 이미 뜨거웠던 징검다리 하나를 건너왔다. 의미조차 퇴색한 사진 몇 장을 삭제하려던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멈칫한다. 어느 카페에서 단지 앙증맞게 예쁘다는 이유로 쓸모를 따져보지도 않고 가방 안에 넣어온 작은 살구잼 빈병을 집에 들고 오자마자 재활용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가 다시 꺼내 선반 위에 올려둔 며칠 전 헤프닝이 생각난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라기 보다 이런 건 궁상에 가깝다. 내게서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건 벌써 오래 전. 며칠 전,비바람에 쓰러진 대파를 낫으로 숭덩숭덩 잘라 모으니 그 양이 제법 많았다... 2018. 9. 4. 얼씨구 절씨구~ 노랑참나리가 꽃을 피웠다. 폭염이 무서워 한 사나흘 못 들여다본 사이 벌어진 일이다. 원예용으로 시중에 나온 것이라면 모를까 자생지에서는 거의 사라져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벌써 삼 년 전이다. 텃밭농사를 시작하던 그해 가을, 꽃동무 한 분이 이 노랑참나리 씨앗을 주셨다. 작은 화분에 따로 심어 싹을 틔운 뒤 화단에 심었어야 하는데 곧바로 밭 한켠에 묻어버렸다. 후회는 되었지만 야생 유전자의 강인함을 믿었다. 씨앗을 묻어둔 자리는 참나리 바로 옆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올라오는 뾰족한 잎들 중에 뭐가 이거고 뭐가 저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삼 년만에 분명해졌다. 지금은 자주 뵐 수 없는 꽃동무님,감사합니다! 본격적으로 수확기에 접어든 오이와 가지는 어찌나 많이 달리는.. 2018. 7. 26. 잡초천국 7월 텃밭 파도처럼 너울대는 상추잎과 부활의 달인 부추,손부채만한 들깻잎, 미끈하게 쭉 뻗은 가지와 며칠 사이 늙어버린 오이를 따 모으니 큰 비닐봉투 하나 가득이다. 오늘 수확한 채소는 모두 지주님께 상납했다. 지주님의 수고로움을 덜어드리고자 채소 일체는 수확 즉시 다듬고 씻어 단정하게 개별포장했다. 그것으로 소작농의 마지못한 의무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이었다는 걸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운전 마지노선인 동두천까지 차를 몰아 신속히 배달을 마쳤다. 돌아와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7층 베란다 창 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민 어르신이 소리쳐 부르신다. 커피 마시고 가. 기분 좋은 호객행위다. 넵! 올라 갈게요. 강바람 들락날락해 시원한 어르신의 부.. 2018. 7. 17. 6월 텃밭 언니, 요즘 밭에 안 가요? 며칠 전 파롱이 내게 물었다. 눈치 빠른 나는 대번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지만 짐짓 모른 척 했다. 열심히 가고 있는데 왜? 그런데 왜 풀만 무성해요? 담장 밖에서 봐서 그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완전 달라. 어느 정도 진실이다. 길가에서 언듯 봤을 때와 쪽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아마존의 밀림과 뒷동산 풀숲 정도? 무더위와 필요 이상의 비가 풀들만 편애하는 이맘때면 내 절망과 죄책감은 극에 달한다. 잘 거둬 먹인 부잣집 남의 자식처럼 통통 살오른 쇠비름 무더기 속에서 배들배들 꼬여가는 가지나 고추를 볼 때마다 데리고 들어와 눈칫밥 먹이는 자식같아 마음이 아프다. 어쩌자고 이짓을... 두 해째 휘둘러 끝이 부러져나간.. 2018. 6. 29. 텃밭,5월 끝자락에서 초여름까지 오월 말경,언니님이 텃밭을 방문했다. 물론 이번에도 빈손은 아니었다. 광릉수목원이었던가? 운 좋게 한 번 알현했을 뿐일 백작약 어린 묘목과 어디 가면 볼 수 있느냐 물으면 어디나 흔하다는 시큰둥한 대답만 돌아오는 앵초와 노랑갈퀴나물 그리고 족두리풀,돌단풍 등이 담긴 박스와 비닐봉다리는 혼자 들기에 버거울 정도였다. 기쁜 만큼 부담감도 적지 않았다. 텃밭인지 꽃밭인지 풀밭인지를 시작한 첫해부터 언니님이 협찬해주신 꽃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극소수 뿐. 이날처럼 불쑥 찾아와 그건 어딨어?라든가 그래, 잘 키우고 있어? 라고 묻기라도 하면 그 잘하던 구라뻥도 입이 얼어 서걱거리곤 했다. 풀인 줄 알고 베버렸어요는 성의라도 있지, 뭐요? 그런 꽃도 주셨어요? .. 2018. 6. 14. 5월 텃밭 작약과 수선화 무스카리 다알리아를 심으며 올해는 이걸로 끝내야지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 지랄같은 마음 밑바닥에 앙금처럼 찹찹하게 가라앉은 흰금낭화, 딱 이거 하나만 더, 진짜 마지막으로. 꽃이 좀 시들면 가격이 떨어질까 살금살금 보던 눈치를 접고 차에서 내려 곧장 흰금낭화 화분으로 직진, 이거 주세요! 마치 단 한순간도 가격때문에 갈등 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커다란 검정 비닐봉투에 담긴 묵지근한 화분을 들고 텃밭 쪽문을 들어섰을 때 개선장군이라도 된 양 가슴이 벅찼다. 잎 겨드랑이에 깨알같은 씨앗이 콕콕 박힌 걸 보니 참나리. 이번에도 기다리던 건 안 나오네. 두루미천남성,자리를 잘 잡았노라 주신 분께 보고드립니다. 용담 주신 분께도요. 풀인 줄 .. 2018. 5. 18. 다알리아 드디어 찾았다. 그 옛날 엄마가 애지중지 키우시던 것과 거의 비슷한 다알리아. 세월따라 꽃도 변했는지 키가 많이 작아졌다. 예전에는 엄청 꺽다리였는데. 이제 깡통만 구하면 되나? 으아, 좋다 좋아! 전곡 오일장에 나온 다알리아 2018. 5. 11. 4월,텃밭 기다렸던 꽃들이 피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발길이 잦아졌다. 매번 씨앗을 묻어놓은 자리부터 뚫어져라 살펴보지만 아직 모르겠다. 뭐가 기다리는 싹인지 뭐가 원치 않는 풀인지, 모르니 함부로 뽑아버릴 수도 없다. 사발농사로 곳간 채운 격으로 여기 저기, 이사람 저사람에게 얻어 심은 꽃들로 화단은 제법 꼴을 갖춰간다. 모종으로 나온 감자와 잎채소를 심은 건 이달 초순. 심고난 다음 날 서슬 퍼런 바람이 불고 급기야 눈까지 내렸다. 상추와 치커리 케일의 어린 잎들은 악.. 2018. 4. 26. 세 번째 쓰는 텃밭일기 봄비에 이어 오지게 매운 꽃샘추위가 이틀 째 계속되고 있다. 모종 심기를 한 주 늦출 수도 있었지만 이미 단단히 마음먹고 있을 고급 인력을 그대로 놀릴 수는 없다. 토마토나 고추 가지같은 열매 달리는 모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니네 농약종묘상점에서 케일 다섯 개 치커리 다섯 개 쑥갓 열 개 사니 상추 열 포기를 덤으로 준다. 참, 접이식 톱까지. 돌아오는 길 시내 한 가게에 더 들려 남아있던 감자 모종 열다섯 개도 샀다. 이후로 더는 구할 수 없다고 한다. .. 2018. 4. 7. 텃밭일기 18 느닷없이 불어닥친 찬바람에 텃밭 채소와 꽃들의 몰골이 초췌해졌습니다. 때가 돼긴 했죠.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넘어설 때마다 늘 처음처럼 놀랍고 황망합니다. 비록 풀들과 뒤죽박죽이지만 텃밭 한켠 백일홍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싶습니다. 곤드레나물과 쪽은 이제 텃밭의 웬수 2종 세트가 됐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 풀들을 무찌르는 것까지는 좋은데 번식력 또한 무서울 정도여서 그대로 놔두면 텃밭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습니다. 내년 농사 계획 중 제일 앞선 과제는 구역을 벗어난 이 녀석들 퇴치작.. 2017. 9. 30. 텃밭일기 17 한 해 두 번 꽃을 피우는 자수정. 꽃 한 송이가 한 다발 노릇을 톡톡히 해냅니다. 아무래도 내년에는 울타리에서 나팔꽃 새싹을 뽑아내는 일에 열을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큰길쪽으로 난 울타리를 거의 다 뒤덮을 기세로 뻗어나가는 걸 막느라 애를 좀 먹었거든요. 늘 그 시간에 골목을 지나가시는 어르신이 조심스레 양철문을 열고 들어오셨어요. 백일홍 씨앗이 여물거든 조금 받아 달라십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지요. 이어 열대 우림의 무슨 나무처럼 자란 .. 2017. 9. 19.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