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고장났다.
설악산 우중 산행 때 나 만큼이나 물을 먹었는지 셔터가 작동을 멈췄다.
어차피 내가 사용하는 정도의 기능이라면
휴대폰 만으로도 충분하므로 책상 한구석에 처박아두고는
놀다 지쳐 생각과 시간이 날 때 직접 들고 나가 수리를 맡겨야지 하고 있었다.
다음 달 예정된 한라산 등반 때는 아예 카메라 없이 갈까도 생각하고 있었다.
뭔 대단한 작품 만들 것도 아니고
조금 힘든 산행을 해보니 이것도 번거롭고 힘킨다.
요정처럼 앙증맞은 내 것에 비해 소도둑만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정원씨는
요즘 남편을 달달 볶고 있다.
멋진 사진 필요 없고 그렇다고 눈 감상만으로 끝내기엔
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아쉬움이 남으므로
찍는 시늉만 낼 수 있게 지수(ㅋㅋ)언니 것과 비슷한 카메라 하나 사 달라고.
질러달라고...
정원씨가 아직 잘 몰라 그렇지 통상 이런 경우
피가 마르게 볶아대는 공격적 전술보다
손목에 붕대 좀 감고 비타민 몇 알 집어넣은 약봉지를 꺼내
보는 앞에서 찍 뜯어 한 삼사 일 복용하며
머지않아 저놈의 소도둑카메라가
내 손목 신경줄과 모가지 뼈를 댕강 부러뜨리고 말 것이니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비명에 횡사를 당하더러도 여보, 절대 울지 않기로 약속!
새끼손가락 파르르 떨며 내미는 게 훨씬 효과적일 텐데... 말이다.
암튼 상남자 돔방님에겐 그 과격한 전술이 먹혀들었는지 드디어
어제 단톡방에 정원씨 즐거운 비명과 함께 어여쁜 신상 하이엔드카메라 모델이 떴다.
한라산에선 360도 화면이 회전되는 카메라를 도너츠 하나 든 느낌으로 사뿐 들어올려
셀카를 찍는 정원씨를 볼 수 있을 듯.
참, 내 고장난 카메라.
이것도 참 눈물겨운 사연을 품고 있다.
몇 해 전 무언가를 찍어대는 일에 한창 재미가 들려
닥치는 대로 눈에 걸리는 대로 찍어 담고 있었다.
내 손에 찍힌 게 다 내 소유가 됐다면
나는 연천 일대 산야와 연천 거주(건장한 남자 사람 포함) 군민들 모두를 거느린
한국판 만수르가 되고도 남았을 거다.
딱 다이알 세수비누만한 그 똑딱이가 사실 내게는 딱이었다.
문제는 그 무렵 주변 지인들 입에서
디에쎄랄이란 생소하고도 상당히 있어뷔는 용어를 주워듣고 부터 생겼다.
관심을 갖고 보니 같은 대상에 사뭇 다른 품격의 그림 차이가 보였다.
것도 노골적으로.
이후로 나는 세수비누 똑딱이를 정 떨어진 님 보듯 하면서
한숨을 내쉬고 치쉬곤 했는데
똑똑한 남편이 내 음흉한 의중을 단박 알아먹고는
동두천 전자대리점으로 데리고 가 삐까번쩍한 카메라 진열대 앞에 세웠다.
왕위 찬탈 말고 선위의 경우처럼 내게는 어쩐지 미안한 직접 구매보다
마음의 선물이라는 아름다운 명분이 필요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손발이 없어 못 가고 못 사들고 오는 게 아니라
취미놀이 하자고 값비싼 장난감 턱허니 사들고 올 배짱을
사는 내내 키우지 못한 탓이다.
그런 거액은 머리 속에서 곧바로 쌀 몇 푸대와 수 개월 난방비로 환산되곤 한다.
학창시절 30점 넘지 않았던 수학 실력으로 볼 때
거의 기적같은 일이 하필이면 꼭 그럴 때만 발생한다.써글~
아무튼 그러저러한 지지리궁상 끝에 얻어걸린 게
지금 사용하는 소니 미러리스카메라다.
복잡한 기능을 익히기에 너무나 게을러터진 머리 믿고
전문가용 카메라를 구입하기엔 다소,아니 심하게 무리가 있다는 판단을 했다.
똑딱이는 똑딱이되 조금 폼만 잡기에는 맞춤했다.
매장에 들어설 때 위풍당당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카드 결제를 하면서 첫날 밤 새색시로 변한 그 똑딱카메라가
고장이 난 것이다.
남편의 고혈과 바꾼 이 카메라를 하마터면 수장시킬 뻔 한 적이 있었다.
어느 아름다운 봄날,
계곡 바위에 붙은 돌단풍을 찍겠다고 몸을 기울이다
그대로 주르르 미끄러져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카메라를 냅따 던져버리고 두 손으로 바위를 잡았더라면
바짓가랑이만 살짝 젖는 선에서 끝났을 일이었다.
헌데 미련한 나는 카메라 살리겠다고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당해보면 다들 알겠지만 그런 상황에선 생각이란 걸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소중한 걸 지키려는 건 본능이다.
총을 들고 도강을 하는 전쟁터 군사처럼
나는 머리끝까지 꼴까닥 물에 잠기면서도 끝내 카메라는 지켜냈다.
돌단풍 꽃 피는 계절이라 아직 물이 찰 때다.
복날 개 떨듯 떨면서도 카메라 무사한 걸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었다.
당시의 흔적은 화면 속 물얼룩으로 아직 남아있다.
그 때 계곡물에서 극적으로 살려낸 카메라가
시나브로 내리는 비를 맞고는 기진해버렸다.
천천히 고치지 뭐 했더니
카메라는 없지만 그 분야 정보엔 선수급인 실땅님이
그대로 오래 놔두면 녹이 슬어 아주 망가질 텐데? 한다.
고집 있는 듯 하면서 은근 심약한 팔랑귀가 나다.
목숨과 맞바꿀 뻔한
주머니 사정 얄팍한 남편이 36개월 아니 평생 할부를 끊어놓고는
아직까지 갚고 있을 지 모를 카메라 아닌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두세 마디 이상 말 섞으면 머리 뜯고 싸우기 좋을 후텁지근 작열하던 어제
소니AS센터를 찾아나섰다.
검색하면 다 나온다.
아~ 정말이지 이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가끔 꿈 같다.
주소 하나 들고 무작정 길 나서 관상학적으로 친절해 보이는 사람 붙잡아 세우고는
수 없이 많은 똑같은 질문을 해댄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두드리면 열리고 얻는 세상이다.
소니카메라 AS센터.
타닥 치니 좌르르 열린다.
친절한 블로그들, 세 살 아기들도 찾기 쉽게 설명해놓았다.
물론 세 살 아기들도 찾을 것 같은 그곳을 단박에 찾아가지는 못했다.
처음 가본 서울 남대문시장이란 데가
그토록 흥미로울 거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약국에서 좌회전하고 곧바로 큰길까지 쭈욱...
이런 친절에도 불구하고 나는 씨앗호떡과 보리찐빵에 정신이 팔려
약국 간판을 못 보고 지나쳤으며 지나친 김에 에라~전곡에는 없는 조각과일 판매대에서
커다란 수박 한 조각을 사 와삭와삭 먹어치웠다.
물건은 사지도 않으면서 길만 묻는 걸 싫어하는 상인들이 더러 있다.
수박을 먹으며 묻고 되돌아 걷다가
비닐 포장지에 독립문 만두라 쓰고 야끼만두라고 부르는
개화기 때 튀겼음직한 마른 만두를 한 봉다리 사들고 잘근잘근 씹으며 또 물었다.
알고보니 참 쉬운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잔치국수, 튀김만두,수박까지 많이도 먹었다.
캐논간판 말고 바로 옆 빠리바게트 건물로...라고 신신당부한 블로거의 말을 까맣게 잊고
씩씩대며 올라가 보니 아니나 달라, 옆 건물이다.
누구라도 시비만 걸었다 하면 곧바로 머리채를 잡고 쓰러질 얼굴을 하고
소니센터에 찾아들어 수리를 맡겼고 택배로 받기로 했다.
소문 대로 친절하셔서 다행히도 머리채를 잡고 뒹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두 손 모아잡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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